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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된 삶보다 의로운 죽음을 택한 700명(사적 제105호 '금산 칠백의총' 안내 및 홍보)

문화재청 문화재청님의 생각  |   201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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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의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욕된 삶보다 의로운 죽음을 택한 700명(사적 제105호 '금산 칠백의총' 안내 및 홍보)'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칠백의총 많이 찾아주세요.

문화재청님의 갈무리
2019-08-27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았던 700명의 남자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한 칠백의총은 1592년 8월 18일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무찌르다

순절한 중봉 조헌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700여 명의 의병을 기리기 위한 유적이다.

중봉 조헌은 조선시대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다. 그는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후율이라 스스로 부르기도 하였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읍 밤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후율정사를 짓고

생애 마지막 7, 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임진년인 1592년

변란 소식을 들었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와 부산과 동래가 연이어 함락되었고 사나흘 만에 조령까지 무너지자 대가가

벌써 피난길에 올랐단 말이냐?"

임금의 피난 소식을 듣고 조헌은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뜻을 같이 하는 사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은 조헌이 혼자

공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순찰사인데 조헌이 먼저 분기하여 공을 앞서 나가려 하니 그가 만약 승리하게 되면 조정에서는

반드시 나의 머뭇거린 죄를 물을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 앞선 윤국형은 조헌을 따라 모인 의병들을 강제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남은 사람은 겨우 700명에 불과했고,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하리라 판단했지만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당시 왜군들은 9군진으로 나누어 조선의 국토를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있었다.

특히 왜군은 군량을 확보하고 후방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호남을 빼앗기면 최악의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해상에서 이순신에게 연패를 당하자 왜군은 내륙으로 진로를 바꿔 금산을 점령한 것이다.

금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조헌은 마침내 700명만을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간파하고 조헌의 군대를 급습해 왔다. 허둥대는 의병들을 향해 조헌이 외쳤다.

"오늘은 단만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나아갈 것이냐 물러날 것이냐,

이 모든 것은 오직 '의(義)'자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욕되게 살지 말고 의롭게 죽자. 앞으로

전진하여 죽을지언정 절대로 욕되게 살아 돌아오지 말자!"

사족들이 다시 힘을 내어 왜적과 붙어 기를 꺾었으나 의병들의 수가 워낙 부족하였고 급기야는

화살까지 다 떨어져 버렸다. 그때 왜군이 정예병 모두를 투입하여 총공격을 해오자 부하들이

조헌에게 고했다.

"이제 빠져 나가셔야 합니다. 더 지체해서는 살 수 없습니다."

조헌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절대로 욕되게 살지 않겠다는 내 말을 장난으로 알았더냐. 장부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구차하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가 내가 순절할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조헌은 스스로 북채를 당겨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리니 기가 꺾였던 사졸들도 조헌을

따라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덤벼들었다. 이미 무기를 잃은 의병들은 맨주먹으로 무장한 적을 맞아 싸우다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왜적들도 의병들의 결사 항전에 많은 타격을 입고 남은 병력을 거두어

진으로 돌아갔다. 사방에 곡소리가 가득하고 시체 태우는 불이 며칠 내내 꺼지지 않았다.

비록 700명이 모두 비참하게 전사했으나 조헌의 금산싸움을 계기로 조선의 호서지방이 온전할 수 있었다.

조헌이 불과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규의 승군과 합세하여 금산으로 진격,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한 이 싸움을 금산전투라 한다.

이때 전사한 이들의 유골을 모아 만든 큰 무덤이 '칠백의총'이다.

<문화재청 - 문화유산 스토리 마당 참조>



최근 악화된 한일관계 속에서 칠백의사의 '조국수호', '신의단결', '학행일치' 정신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사적 제105호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민족의 빛나는 호국정신의 상징이자 그 숭고한

가치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기면 살아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충남 금산에 위치한 '칠백의총'을 많이 찾아주시고,

칠백의총관리소에 남기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댓글로 많이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았던 700명의 남자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위치한 칠백의총은 1592년 8월 18일 금산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무찌르다

순절한 중봉 조헌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700여 명의 의병을 기리기 위한 유적이다.

중봉 조헌은 조선시대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다. 그는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후율이라 스스로 부르기도 하였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읍 밤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후율정사를 짓고

생애 마지막 7, 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임진년인 1592년

변란 소식을 들었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와 부산과 동래가 연이어 함락되었고 사나흘 만에 조령까지 무너지자 대가가

벌써 피난길에 올랐단 말이냐?"

임금의 피난 소식을 듣고 조헌은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뜻을 같이 하는 사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승군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은 조헌이 혼자

공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순찰사인데 조헌이 먼저 분기하여 공을 앞서 나가려 하니 그가 만약 승리하게 되면 조정에서는

반드시 나의 머뭇거린 죄를 물을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 앞선 윤국형은 조헌을 따라 모인 의병들을 강제 해산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남은 사람은 겨우 700명에 불과했고,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하리라 판단했지만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당시 왜군들은 9군진으로 나누어 조선의 국토를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있었다.

특히 왜군은 군량을 확보하고 후방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호남을 빼앗기면 최악의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해상에서 이순신에게 연패를 당하자 왜군은 내륙으로 진로를 바꿔 금산을 점령한 것이다.

금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조헌은 마침내 700명만을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간파하고 조헌의 군대를 급습해 왔다. 허둥대는 의병들을 향해 조헌이 외쳤다.

"오늘은 단만 한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나아갈 것이냐 물러날 것이냐,

이 모든 것은 오직 '의(義)'자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 욕되게 살지 말고 의롭게 죽자. 앞으로

전진하여 죽을지언정 절대로 욕되게 살아 돌아오지 말자!"

사족들이 다시 힘을 내어 왜적과 붙어 기를 꺾었으나 의병들의 수가 워낙 부족하였고 급기야는

화살까지 다 떨어져 버렸다. 그때 왜군이 정예병 모두를 투입하여 총공격을 해오자 부하들이

조헌에게 고했다.

"이제 빠져 나가셔야 합니다. 더 지체해서는 살 수 없습니다."

조헌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절대로 욕되게 살지 않겠다는 내 말을 장난으로 알았더냐. 장부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구차하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가 내가 순절할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조헌은 스스로 북채를 당겨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리니 기가 꺾였던 사졸들도 조헌을

따라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덤벼들었다. 이미 무기를 잃은 의병들은 맨주먹으로 무장한 적을 맞아 싸우다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왜적들도 의병들의 결사 항전에 많은 타격을 입고 남은 병력을 거두어

진으로 돌아갔다. 사방에 곡소리가 가득하고 시체 태우는 불이 며칠 내내 꺼지지 않았다.

비록 700명이 모두 비참하게 전사했으나 조헌의 금산싸움을 계기로 조선의 호서지방이 온전할 수 있었다.

조헌이 불과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규의 승군과 합세하여 금산으로 진격,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모두 전사한 이 싸움을 금산전투라 한다.

이때 전사한 이들의 유골을 모아 만든 큰 무덤이 '칠백의총'이다.

<문화재청 - 문화유산 스토리 마당 참조>



최근 악화된 한일관계 속에서 칠백의사의 '조국수호', '신의단결', '학행일치' 정신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사적 제105호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민족의 빛나는 호국정신의 상징이자 그 숭고한

가치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기면 살아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충남 금산에 위치한 '칠백의총'을 많이 찾아주시고,

칠백의총관리소에 남기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댓글로 많이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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